[칼럼] 구글의 '공동묘지', 실패 수용하는 애자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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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22-12-30 16:19 조회 2,506 댓글 0본문
애자일(agile)은 인기 많은 단어다. 애자일 방법론은 전통적인 정보기술(IT) 개발 방법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탄생했다. 세상의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는 것은 IT만의 이슈가 아니므로 지금은 조직 구성 방식, 일하는 방식, 경영 방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접목이 이루어지고 있다.
애자일은 ‘기민한’ ‘민첩한’으로 해석되니 똑똑하고 빈틈없어 보이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러나 애자일의 숨은 뜻은 ‘일단 저지르고 보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에 가깝다. 애자일 소프트웨어 개발 선언문의 골자는 잘 다듬어진 문서가 아닌 겨우 동작하는 시제품을 먼저 만들어 부족함을 드러내고 몇 번이든 수정하겠다는 것이다. 이 과정은 실패를 전제해야만 가능하다.
아마존의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는 ‘발명과 방황, 2021’에서, 그간 아마존이 실패해온 것들의 규모가 수십억달러에 달하고 실패는 발명과 위험 감수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결과라며 아마존을 가장 실패하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다. 구글도 만만치 않다. 2006년부터 ‘구글 공동묘지’라는 공간을 웹상에 만들어 단종된 제품·서비스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166가지에 이른다. 실패가 있었기에 지금의 구글이 있고 구글의 미래가 가능하다는 강력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글로벌 빅테크 사례가 우리 기업 현실과는 먼 얘기로 들릴지 모르겠다. 토스의 창업자 이승건 리더는 유튜브에 본인이 강의하는 영상을 올렸다. 오랜 기간 실패를 거듭한 이야기다. 초기 2년간 본인이 기발하다고 생각한 아이디어를 고집하고 시장 반응이 안 좋은 것은 디자인, 기능의 문제라고 생각해 디자인을 바꾸고 기능을 계속 추가했다. 결과는 처절한 실패였다.
다시 사업 아이템부터 발굴해서 100여 개의 아이템을 모으고 빠르게 테스트해나갔다. 5년간 8개의 서비스에 실패했다. ‘간편송금’ 아이템은 공감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혼자 페이스북에 광고를 올려보았다. 반응이 있어서 송금 서비스를 소개하는 홈페이지를 만들었는데, 문의가 많이 들어왔다. 이때부터 기능을 개발했다. 간편송금에서 출발한 토스는 지금 은행, 증권, 보험을 아우르는 슈퍼 앱이 됐다.
이렇게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누구나 탐낼 것이다. 더욱이 디지털 전환이 시대의 요구가 되면서 과감한 도전 없이는 도태된다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2017년에 출범한 카카오뱅크가 은행 앱 중 월간 활성 이용자 수 1위를 달리고 있고, 2014년에 로켓배송을 시작한 쿠팡이 2022년 상반기 기준 온라인 유통 시장 점유율 1위다. 당연히 전통 기업들도 손을 놓고 있지 않다. 수년 전부터 디지털 전담 조직이 신설됐고 사내벤처, 사내독립기업(CIC) 사례들도 이어진다. 최고경영자(CEO)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말은 신년사의 단골 메뉴다.
그런데도 애자일이 조직에 정착됐다는 얘기는 잘 들리지 않는다. 우선은 내부에서 투자 의사 결정을 받기까지가 지난하다. 기술 테스트를 통과해야 하고 투자수익률(ROI)을 산출하여 승인받아야 한다. 이러한 절차는 실패 위험을 줄이기 위해 필요하다.
문제는 너무 오래 걸린다는 점이다. 최근 어느 협업 툴 회사의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협업 툴 도입 사전 검토에만 1년이 걸리는 대기업도 있다고 한다. 인공지능(AI)같이 데이터양과 품질이 중요하거나 메타버스(metaverse·현실과 가상이 혼합된 세계)같이 이제 시장 형성 초기인 기술, 아이템들은 가시적인 성과를 바로 보이기가 어렵다. 그러나 단기 성과에 집착하는 조급증으로 인해 새로운 시도들이 자리 잡기도 전에 실패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다.
애자일 조직의 DNA 비밀
고객의 욕망을 찾아내는 과정은 미지를 탐색하는 것과 같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불편을, 있는지도 몰랐던 욕망을 일깨우는 과정이다. 디자인 싱킹, 최소기능제품(MVP)의 핵심은 같다. 고객도 모르는 고객의 마음을 상상하지 말고 무언가를 일단 보여줘 답이 아니라 반응을 얻고, 고쳐서 다시 보여주고 다시 반응을 얻자는 접근이다. 한 번에 증명할 수 없는 일을 증명이 끝난 후 시작할 수는 없다.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결국은 가장 늦게 된다. 작게 시도하고 길을 바꾸거나 길을 넓혀가면 된다. 고객의, 시장의 반응이 기대만큼이 아니라면 그러한 결과를 알게 된 것이 성과다.
좋은 소식이 있다. 노코드 툴(코딩 없이 소프트웨어 제품을 만들 수 있게 하는 도구)은 개발자의 도움 없이도 고객이 실제 사용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능을 구현해 가설을 테스트할 수 있게 해준다.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인 블라인드에서 채용 서비스를 기획한 프로덕트 관리자는 몇 가지 노코드 툴을 배워 2주 만에 최소 기능을 만들고 고객의 실제 반응을 데이터로 모은 후에 이 결과를 기반으로 정식 제품 개발을 승인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출시는 진화의 시작점
기성품인 솔루션이 아니라 계속 발전 중인 AI 기술을 적용하고 고객과 상호작용을 축적해 맞춤화하는 제품·서비스를 지향한다면, 출시 시점에는 미완성 상태일 수밖에 없다. 얼마나 더 빨리 배우고 얼마나 더 빨리 업그레이드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A기업의 사례를 보자. A기업은 콜센터 상담원이 고객과 대화하면서 잘못 안내한 사항이 있는지를 AI가 자동으로 평가하는 시스템을 다른 기업보다 빨리 도입했다. 하지만 평가자가 하던 일을 바로 대신할 수는 없었다. 전화 음성에 주변 잡음이 들어가서 잘못 인식되거나 단어 하나만 잘못 말해도 지적하는 등, 상담원이 받아들이기에는 온도 차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스템 도입으로 인건비를 절감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므로 실패한 프로젝트로 몰리게 됐다. 그러나 시스템을 어떻게 현장에서 활용할까에 집중하면서 해결책을 찾아갔다. AI가 판단한 결과를 평가자가 빠르게 재확인하게 했고 평가 절차를 간소화해서 생산성을 높였다. 개인별로 통계를 내서 관련된 교육을 이수하도록 했더니 잘못 안내하는 빈도가 줄었다. 민원 위험이 높은 통화를 선별하는 AI 모델을 추가로 만들어 효과를 높였다.
제품·서비스를 만드는 과정도 그렇지만 출시된 후에도 시행착오를 감당해야 한다. 특히 AI는 시행착오를 통한 배움이 있어야 똑똑해진다. AI가 아무리 똑똑해도 아직은 서로 다른 주제를 연결할 줄 모르니 사람의 지혜가 필요하다. 경영진이 프로젝트의 종료, 제품·서비스 출시와 함께 성패가 결정된다고 믿는다면 모두 실패로 낙인찍힐 위험이 있다.
애자일 문화, CEO의 책임
토스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승건 리더는 프로덕트 관리자들에게 ‘나약함을 드러내고 실패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성공을 가져온다’는 원칙을 직접 주기적으로 말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기능을 먼저 신경 쓰고 많이 만들려고 하는 모습이 보인다고 한다. 이미 애자일로 성공한 기업이 이렇다면 전통 기업들 내부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CEO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다만 더 나아가서 ‘정말 그럴까’라는 의구심도 없애야 한다. CEO는 실패의 원인을 사람에게서 찾기 전에 제도, 환경에서 먼저 찾아야 한다. 부정한 일에는 불이익을 줘야겠지만 시도하지 않았으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이 기대와 다르다고 하여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어서는 안 된다. 조직 구성원은 CEO가 한 말이 아니라 실제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고 확실하게 배운다. 배달의민족 앱을 운영하는 우아한형제들은 대규모 서비스 장애가 여러 번 발생했지만, 개발자를 징계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업 성장에 기여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고 장애가 발생할 만한 위험을 미리 제거하지 못한 전체적인 문제로 접근하기 때문이다. 만약 개인을 징계한다면 누구도 변화를 시도하지 않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애자일을 조직에 뿌리내리게 하기 위한 많은 노력이 관찰된다. 팀을 재구성해보고 권한을 내려주고 회의 방식을 바꾸고 협업 툴을 마련한다. 그러나 변화를 시도하면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실패 순간에 대해 CEO가 어떤 자세를 보여주냐가 겉으로 보이는 애자일이 아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애자일을 가능하게 하는 열쇠다. 애자일은 조직 문화다. 권오현 삼성전자 상임고문은 EBS 특강에서 좋은 조직 문화는 CEO나 오너가 필사의 의지로 솔선수범해야만 만들어질 수 있다고 했다. 오늘도 애자일한 성장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경영자라면 명심해보았으면 한다.
이용수 IGM세계경영연구원 교수
* IGM세계경영연구원은 이코노미조선에 해당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칼럼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