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새로운 추진력을 제공하는 ‘무자극’의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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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 21-09-27 14:05 조회 4,507 댓글 0본문
자극으로 가득 찬 ‘편집의 시대’…단순함의 가치 중요해져
최근 조용하게 시청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한 프로그램이 있다. 한 방송사에서 밤 12시를 넘긴 시간에 방송하는 ‘가만히 10분 멍TV’라는 프로그램이다. 정말로 10분 동안 일상적인 영상만 틀어준다. 어떤 설명도 하지 않는다.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모를 영상을 자연스럽게 멍하니 보게 된다.
예를 들어 달팽이 한 마리가 10분 동안 움직인다. 보고 있다 보면 정지 화면인가 싶기도 하다. 또 다른 10분은 바닷가의 파도가 부서지는 장면이다. 거친 파도와 함께 하얀 거품이 끝없이 부서진다.
10분 동안 고등어를 굽는 장면도 있다. 그냥 아무 설명 없이 고등어 한 마리만 계속 굽는다. 어느덧 시계를 보면 10분 동안 반복되는 화면 앞에서 멍을 때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조용하지만 강한 ‘무자극 욕구’
처음 이 프로그램을 봤을 때는 10여 분을 채 보지 못했다. ‘방송 사고가 났나’라는 생각이 들어 확인한 기억도 있다. 실제로 방송 초기에는 시청자들에게 항의 전화를 받았는데 이제는 꽤 많은 사람들이 이 늦은 시간대에 이 프로그램을 즐긴다고 한다. 재미있는 현상이다.
여하튼 그 비싼 공중파 방송 시간에 이런 두려움 없는 기획을 한 것이 대단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사실 이와 비슷한 현상과 흐름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울시청 광장에서 있었던 ‘멍 때리기 대회’나 최근 유튜브에서 유행하고 있는 자율 감각 쾌락 반응(ASMR) 영상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영상들이 수백만의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다. 자극적이지도 않으면서 생각도 할 필요 없이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게 된다.
다른 사례이기는 하지만 드라마에서도 이런 현상을 볼 수 있다. 별로 특이한 반전이나 화려함이 없이 흘러가는 물처럼 편안한 스토리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슬기로운 의사생활’과 ‘라켓소년단’이다. 다른 드라마와 비교하면 밋밋할 정도의 편안함과 자연스러움이 가득 차 있다.
최근 사회적 현상들과 기업 내부에서 발생하는 불편한 현상들을 보면 ‘왜 이렇게 도를 넘은 행동들과 사건 사고들이 많아지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정상적이지 않고 비상식적인 현상들이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나마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찾아가고 있는 해법이나 치료제 같은 자연스러운 모습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움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흐름이 많아지고 있다. 그리고 그 효과는 조용하지만 강하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다음의 세 가지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첫째, 무자극의 욕구다. 자극적인 것들이 가득찬 현대사회의 피로감을 거부하는 욕구를 반영하고 있는 말이다.
우리를 둘러싼 대부분의 미디어와 그 속의 메지시들이 점점 더 현란해지고 복잡해지고 있으며 이런 경쟁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을 정도로 치열한 상황이다.
아무 생각 없이 ‘멍을 때리기’ 행동이 이러한 무자극의 상태라는 과학적인 설명도 있다. 2001년 미국의 신경과학자 마커스 라이클 박사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는 상태, 즉 우리가 말하는 ‘멍 때리기’의 상황에 빠졌을 때 뇌의 특정 부위가 활성화되는 것을 발견했다.
정확히 표현하면 ‘무자극적 사고’에 빠진 상태에서 일어나는 상태이며 이를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MN : Default Mode Network)라고 부른다.
무언가 해야 할 일로 가득해 뇌를 움직이면 DMN의 활동이 억제되고 휴식, 즉 자극이 없게 되면 이 기능이 활성화되는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DMN은 창의적인 사고와 생각을 필요로 할 때 활성화되는 뇌의 신경망이라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우리의 뇌는 무언가를 발견하거나 생각해 내게 된다는 점이다.
머리를 괴롭히던 고민이 욕조에 몸을 담그면서 무언가를 깨닫고 풀리는 유레카의 경험이 어찌 보면 과학적으로는 당연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노래 한 곡을 만드는 과정을 보면 하나하나가 다 기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짜고 붙이는 방식이 들어간다. 더 나아가 대부분의 영상물이나 콘텐츠를 보면 여러 차례 편집의 기술을 발휘해 멋진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콘텐츠는 감동을 느낄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임팩트는 있는데 그 효과가 길지 않다. 작위적이지 않은 세련됨은 있지만 마음을 잡아 끌지는 못한다. 아무런 편집 없이, 화려한 화면 전환이나 기교 없이, 통으로 보여주는 영상의 힘이 주는 묘한 감동과 몰입이 더 와 닿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단순함을 추구하는 가치가 중요해지고 있다. 점점 더 복잡해지는 이슈와 문제들에 치여 오히려 올바르지 않은 판단과 결정을 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이를 심리학자인 수전 놀렌 혹스마는 ‘오버 싱킹(over-thinking)’이라고 표현한다. 지나치게 많이 쏟아지는 정보와 분석의 과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이슈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현상이다. 이에 수반되는 스트레스와 피로감은 이 수렁에 깊이 빠져 본 사람은 안다.
이런 현상을 기업의 변화와 경영 관점에서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단순히 사회적인 현상이라고만 내버려둘 수는 없을 것이다. 궁극에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 흐름은 기업과 조직에도 투영되며 내부 구성원이던 고객이던 ‘사람’을 둘러싼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진행하고 있는 기업들의 프로젝트에서 엿볼 수 있는 현상 중 하나가 바로 리더들의 정신적 ‘번아웃’이 더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슈로 지쳐가는 기업의 경영 환경, 리더들과 조직 구성원들의 에너지를 회복하고 관리하는 노력이 중요해지고 있다. 경영진과 리더들의 고민이 심각해지고 있고 특히 끼어 있는 세대라고 불리는 기성세대들의 에너지가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다. 결국 여러 부작용과 갈등을 만들어 내고 있는 형국이다.
또 다른 예가 바로 마케팅과 홍보다. 우리 기업의 상품이나 서비스가 얼마나 좋은지 설명하기 위해 점점 더 메시지의 강도와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사실 그럴수록 고객의 반응은 더 차가워지는 데도 말이다.
혹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이 어떤 문제와 이슈를 풀어야 하는 숙제를 갖고 있거나 또는 비즈니스 전략을 고민하거나, 더 나아가 사람과 조직 관리 그리고 리더십에 대한 고민이 복잡하게만 느껴지는 상황이라면 위의 세 가지 키워드의 프레임을 활용해 보자. 기대 이상의 소득과 경험을 갖게 될 것이다.
매일 쌓여 가는 일과 이슈에 지쳐가는 리더들과 구성원들에게 쉼표와 또 다른 에너지원을 제공할 것이다. 한 번 시도해 보자. ‘유레카’는 모두에게 일어날 수도 있다. 밑져야 본전이다.
** IGM세계경영연구원은 이코노미조선에 해당 컬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https://magazine.hankyung.com/business/article/202109082223b